한국의 당구역사
(이 글은 당구원로이신 조동성씨가 오래 전에 발간한 책에서 간추린 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경험담을 곁들여서 자세하게 우리나라의 당구역사를 조명하고 있다. 이 글이 당구역사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황까지 알아보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1909년에 일본인에 의해 우리나라 왕실에 처음으로 당구대가 설치되었다. ‘순종 국장록’은 순종 임금의 장례식을 기록한 것으로서 순종의 생시 모습과 유품을 수록한 사진첩으로 되어 있는데 18페이지에 보면 화려하고 넓은 궁중 내실에 당구대 2대와 계산대, 큐대 등이 보이는 사진이 있으며 86페이지에는 ‘운동상 필요한 옥돌’이라는 제목하에 “… 인정전 동행각에 옥돌대 2대가 놓여 있어서 때때로 대신들과 큐대를 잡았다. 국내외 옥돌 선수가 경성에 이르기만 하면 반드시 접견했다. 맞수가 되는 사람은 전 창덕궁 경찰서장인 야노였는데 게임에서는 이기려는 생각은 없었고 단지 어떻게 하면 흥미있게 이끌 수 있을까하는 고상한 생각으로 게임했으며 실력은 60점에서 70점 정도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의 60점이면 현재 150점 정도의 수준이다. (원래의 4구게임은 현재 유행하는 빨간볼치기와 상당히 다르다. 즉 빨간볼 2개와 흰볼 2개로 플레이하는데 자기 수구인 흰볼 하나로 다른 3개의 적구중 2개 이상을 맞히면 득점이 된다. 따라서 빨간볼치기보다 득점하기가 훨씬 쉽다. 흰볼과 빨간볼 하나를 맞히면 2점, 빨간볼 2개를 맞히면 3점, 3개의 적구를 다 맞히면 5점으로 계산한다. 빨간볼치기는 더 어렵기 때문에 자기 점수의 1할(1/10)만을 득점하도록 되어있다.) 당구가 왕실에서 실내 스포츠로서 애용되고 있는 동안에 일본인들은 1920년에 조선총독부 직원들의 휴식처로서 남산 입구(지금의 여성회관 부근)에 ‘경성구락부’를 세웠다. 대지 약 2천평의 2층 건물이었다. 이 건물 1층에 일반 직원용으로서 3대, 2층에는 고관용으로 2대를 설치했다. 또한 서대문 전매청앞에 1대, 지금의 용산 우체국 뒤인 관사촌에 1대, 총독부 옆 왜성대에 3대를 설치하여 총독부 직원들만 이용하도록 했다. 그리고 경성제국대학교 예과대학(지금의 청량리 라이프 주택 자리)에 1대를 설치하여 교직원들이 이용하도록 했다.
이때부터 당구는 서서히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여 영업용인 당구장도 등장한다. 그 시초는 왜인촌이 있던 진고개 (지금의 충무로 2가) 부근에 일본인이 경영하던 ‘파주정’이라는 곳이었다. 거기에 1대가 설치되었고 그 옆에 아하라가 경영하던 ‘지하지’에 2대, 충무로 1가 제일은행 본점뒤 ‘아사이’ 당구장에 2대가 설치되었다. 당시 한게임당요금은 1인당 5전이었는데 4명이 게임을 한다면 1등 한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명이 각각 5전씩 지불했다. 해방 직전에는 1인당 8전씩 하다가 시간제로 받기 시작했는데 한시간당 당시 쌀 한말값에 해당하는 1원 20전씩 받았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종로 방면에 당구장을 개업하기 시작했다. 1924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임정호라는 사람이 지금의 조흥은행본점 건너편에 ‘무궁헌’을 간판으로 2대의 당구대를 설치했는데 주로 일본 유학생들과 일본 대학 졸업생들이 이용했다. 윤치호 선생이나 유진오 선생 등도 학생들을 만나기 위해 그곳에 자주 왕래했다. 그후 ‘광교 당구장’, ‘종로 당구장’이 각각 2대의 당구대를 설치하고 개업했고 1925년에 인사동 입구에 ‘동아 당구장'(2대), 종로 2가에 ‘중앙 당구장'(캐럼 당구대 4대, 포켓 당구대 1대), ‘테이라 당구장'(2대) 등이 개업하는 등 해방 직전에는 서울에만 33개소의 당구장이 있었다.
당시 일제하에 당구장을 출입하는 사람들은 특수 계급층이나 종로에서 포목점, 양복점, 요식업 등을 하는 부호들, 망또를 펄럭이며 사각모자를 쓴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게임이 끝나면 의례히 명월관이나 국일관 등의 요정으로 달려갔다. 금전에는 구애를 받지 않고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여유있는 상류층 한량들이었던 것이다. 명월관의 주인인 이기우라는 사람도 300점의 고점자였다.
우리나라에 당구가 서서히 보급되어 가던 중에 일본의 유명한 가스라 가족이 등장했다. 제 5,6,7차 한일 친선 당구대회에 참가했던 가스라 가스시게 선수는 노리꼬의 친아들이다. 가스라 마사꼬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대관식에 초청받아 그곳에서 가진 각국 선수들과의 친선경기에서 우승했을 뿐만 아니라 1940년에는 10,000점을 단한큐에 끝낸 최초의 선수가 되기도 했다. 동생 노리꼬도 일본 국내 대회에서 여러번 우승했고 재일동포 윤춘식씨와 번갈아가면서 챔피언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 두 여걸은 1930년 봄에 일본 ‘스가누마’ 당구대 제작회사에서 후원한 시범게임을 갖기 위해 서울에 왔다. 이때 마사꼬는 21세, 노리꼬는 17세였다. 이들은 첫날 조선호텔에 여장을 풀고 호텔내에 설치된 당구대에서 시범에 들어갔다. 마사꼬가 4구식 1,500점을 단큐에 치고 3구식 300점을 다시 단큐에 친 다음 스리쿠션 15점을 13큐만에 끝냈으며 노리꼬도 두 종목을 단큐에 끝내 관람하고 있던 국내외인들을 탄복시켰다. 이튿날에는 종로 2가의 ‘중앙 당구장에서 시범을 보였는데 전날 시범에서 보여준 묘기가 삽시간에 알려져 방용하, 우인근씨를 비롯한 장안의 최고점자들과 당구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당구장 마루바닥이 내려앉을 정도였다. 마사꼬가 먼저 4구식으로 1,500점을 세리기로 단큐에 치고나오자 노리꼬 역시 1,000점을 단큐에 쳐냈으며 다음에 3구식 300점을 둘다 단큐에 친 다음 마지막 스리쿠션 게임에서는 언니는 15점, 동생은 10점을 10큐만에 끝냈다. 관중들은 숨을 죽이고 지켜보다가 넋을 잃고서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하고 있었다. 다음날에는 을지로 2가의 ‘황금구락부’에서 시범을 가졌는데 이틀간의 시범에 대한 소문을 듣고 당구팬들이 전차길까지 늘어서는 바람에 교통순경들이 정리하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다.
내가 당구인으로서 한평생을 살게 된 동기는 사소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14세때인 어느날 우연한 기회에 아버지를 따라 ‘종로 당구장’으로 가서 아버지가 당구하시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당시에 우리집은 낙원동에 있었고 나의 아버지는 일본, 중국 등을 무대로 무역업을 크게 해서 많은 돈을 모았는데 성격도 매우 활달하셨다.
아버지를 따라 당구장을 처음 갔다 온뒤 며칠 후에 나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친구 몇명과 함께 낙원동 입구에 있던 ‘동양 당구장’에서 난생 처음으로 큐대를 잡게 되었다. 당시에는 미성년자도 당구장 출입이 자유로웠다. 초보자는 7점을 놓고 치는데 큐 이내에 끝낼 수 있어야 한다. 게임은 4구식으로서, 4까지 할 때에는 제일 먼저 7큐안에 끝나는 한명만을 제외하고 나머지 3명이 모두 패한다. 5명 이상이 게임할때는 승자를 2명 뽑는다. 패자는 1인당 7전씩 비싼 요금을 물어야 했다.
당시의 당구장에는 당구대마다 게임 기록도 하고 손님들 시중도 들어주는 아가씨가 한사람씩 딸려있었다. 짧은 치마에 머리를 양갈래로 짧게 딴 신식여성들의 모습은 우리들의 넋을 앗아가기도 했다.
어느 정도 당구에 숙달되자 그뒤부터는 밤에 잠자리에 누워도 천장이 당구대로 보이고 그 속에서 빨간볼과 흰볼이 왔다갔다 했다. 밥상위에 놓인 그릇을 볼때나 수업시간에 학생들의 해골을 뒤에서 보면 모두가 볼로 보였다. 학교 수업이 끝나기만 하면 곧장 당구장으로 달려가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갔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벌써 100점을 놓게 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혜화 전문학교(지금의 동국대학교)에 응시했다. 합격자 발표가 있던날 내가 합격되었다는 사실을 알자 들뜬 나머지 그 길로 곧장 당구장으로 달려가서 낮 12부터 밤 12까지 볼을 밀고다녔다. 그날 저녁 아버지로부터 날이 샐때까지 꿇어앉아 벌을 받았다. 집에 합격했다는 사실을 연락하지도 않고 당구장으로 간것이다.
전문학교에 다니면서도 매일같이 당구장에서 살다시피했다. 그렇지만 친구들과 가면 언제나 게임을 구경만 하는 신세였다. 당시 나는 200점을 쳤으므로 기껏해야 30점에서 60점을 치던 친구들이 상대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는 중국어 수업시간에 마문장이라는 교수가 시종 당구 이야기만 하자 한 학생이 교수님은 몇점을 치느냐고 물었다. 120점을 친다고 하자 그 친구가 조용히 앉아있는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조동성군은 200점이나 치는데요”하는 것이었다. 교수는 깜짝 놀라면서 나에게 어느 당구장에 가느냐고 물었다. 내가 ‘지하지가’에 간다고 하자 이튿날로 그 당구장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뒤부터 수업만 끝나면 교수님과 함께 당구장으로 갔고 같이 술도 마시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당시에 우리나라의 고점자들은 주로 종로 화신백화점 뒤 ‘장안 당구장’에 모여 게임을 즐겼다. 모두들 여유있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어서 게임이 끝나면 요정을 찾았다. 명동의 ‘지하지가’와 ‘동지구락부’는 주로 일본인들이 출입했다. 그곳에 가서 일본인들을 이겨서 당구요금을 잔뜩 물게 하는 것이 나로서는 가슴 후련한 일이었다.
당시에 인기연예인들도 서대문의 ‘자연장 당구장'(이전의 동양극장 건너편)에서 당구를 즐겼는데 배우 김승호씨가 60점, 가수 남인수씨가 150점을 쳤다. 그들은 일이 없을때에는 하루종일 당구장에서 노닥거렸다.
해방이 되자 사회풍조가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여자들의 몸빼가 서양치마와 바지로 바뀌고 거리에는 서양 물건이 활개쳤다. 사람들은 흥청망청해져서 명동이나 종로 등의 번화가는 온통 술집, 다방, 댄스교습소 등이 들어서 사치와 유행의 거리로 변했다. 당구는 외면을 받게되어 해방 당시에 서울에 33개소이던 업소가 하나둘 줄어들어 20개소에 불과하게 되었다. 명동의 ‘지하지가’, ‘동지구락부’, 종로의 ‘장안 당구장’, ‘중앙 당구장’, ‘테이라 당구장’, ‘종로 당구장’이 모두 술집으로 바뀌었으니 그때의 사회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1947년에 이르자 다시 당구장이 하나둘씩 늘어난다. 명동에 ‘태양 당구장’과 ‘마돈나 당구장’이 들어서는 등 서울에서만 10여개소가 늘었다. 그와 더불어 당구 애호인들도 급격히 증가하여 당구장마다 초만원을 이루었다. 물론 지방에서도 당구장이 계속 늘어갔다.
6.25 사변중에 피난민들은 경남 지방으로 집중되었으므로 자연히 그 지역의 당구업계에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다 주었다. 1954년경 부산 광복동 2가의 미화당 2층에는 16대의 당구대에 각 당구대마다 게임 계산을 해주는 여자 종업원을 고용한 당구장이 생겨났다.
1955년 11월에 미도파 백화점 뒤의 ‘삼화 당구장’에서 뜻있는 당구인들이 모였다. 6.25사변으로 인한 당구계의 무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협회를 조직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드디어 ‘대한당구협회’가 발족하게 되었다. 초대 회장에는 자유당 의원으로 국회 부의장이기도 했던 이재학씨가 선출되었고 부회장에는 방용하씨와 홍사철씨가, 이사장에는 이한종씨가 각각 선출되었다.
충남 보령군에서 석판이 생산됨에 따라 모든 당구재료가 완전 국산화되었다. 당구는 더욱 널리 보급되어 서울 뿐만 아니라 지방의 모든 업소들이 호황을 누렸다. 1957년경에는 서울에만 750개의 당구장이 성업을 하고 있었다. 어디든 신축건물만 세웠다 하면 너나 할 것 없이 당구장을 개업했고 2층에 당구장이 있는데도 3층에 또다른 당구장이 들어서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대표적인 당구장은 Y.M.C.A뒤의 ‘국일 당구장’으로 20대의 당구대에 20명의 여자 종업원을 두고 영업하고 있었고 미도파 백화점 5층에는 16대의 당구대를 설치한 당구장이 있었다.
이즈음 4구 빨간볼치기가 유행하게 된다. 원래 이 게임은 외국의 어느나라에도 없는 게임방식이다. 서울의 ‘삼화 당구장’에서 고점자들이 정식 4구게임에 싫증을 느껴 자기 점수의 2할을 놓고 빨간볼치기를 하자 하점자들이 흉내내어 자기 점수의 1할을 놓고 치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까지 유행하고 있다.
자유당 말기부터 빨간볼치기가 유행했고 당구장마다 내기당구가 성행했다. 빨간볼치기는 하점자보다는 고점자에게 더 유리하기 때문에 큐대 하나 들고서 전국을 누비고 다니는 허슬러들도 생겨났다. 또한 직장인들끼리도 내기 당구를 했다. 당구계의 혼란은 6.25 당시보다 더 심해졌다. 깡패들의 횡포는 극에 달해 당구장은 지역 깡패와 손잡지 않고는 영업할 수 없었다. 깡패들은 소위 ‘기도’라는 명목하에 내기당구를 하게 하고 돈을 딴 사람에게 터무니없는 몫을 갈취해갔을 뿐만 아니라 업소의 수익금에서 일부를 상납하게 했다. 그런데다 당구장 운영이 다방이나 음식점같은 업소보다 쉽다는 생각에서 ‘당’자도 모르는 여자들까지 당구장을 개업하게 되었고 무허가 당구장이 전국에 난립했다. 각 당구장마다 손님 쟁탈전이 벌어졌다. 손님들에게 차를 대접하고 식사까지도 무료제공하기도 했다.
1960년에 이르자 깡패들의 횡포와 당구계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이듬해 5.16과 더불어 각종 유흥업소에 대한 단속이 시작됨에 따라 내기당구를 하는 업소 단속도 시작되었다. 단속이 너무 심해서 사람들은 당구장 출입을 기피했다. 그렇지만 건전하게 운영해온 업소들은 오랜만에 떳떳하게 영업할 수 있었다.
사회가 안정되고 1965년에 제3회 전국당구대회가 개최되었다. 참가 선수는 200명이 넘었고 관중도 장충체육관이 좁을 정도로 운집했다. 선수들의 묘기가 나올 때마다 관중들의 박수소리와 환호소리로 장충체육관이 떠나갈 듯했다.
참조 : 스리 쿠션 게임